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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itary

포클랜드 전쟁 ; 두 정치인의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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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에서 대한민국과 일본만큼이나 치열한 축구 경기가 있습니다. 바로 영국과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입니다. 이 두 나라는 과거 전쟁으로 인해 이와 같은 라이벌이 되었는데 오늘은 축구 강국인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경기를 치열하게 만든 포클랜드 전쟁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포클랜드 섬의 배경

포클랜드는 아르헨티나로부터 500km 떨어진 섬으로 한때 해군력이 강했던 영국이 포클랜드를 실효지배 하고 있었으나, 불분명한 영유권 역사로 인해 아르헨티나가 1950년대부터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이 일대를 둘러싸고 1960 ~ 70년대까지 여러 차례의 영유권 협상이 있었으나 영국측의 거부와 지역 주민들의 아르헨티나 귀속 반대 여론으로 인해 모두 결렬되었습니다. 

 

당시 아르헨티나의  상황

아르헨티나는 군사 쿠데타로 혼란의 시기를 겪고 있었고, 이전에도 좋지 못했던 경제 상황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군부 독재에 대한 민주화 운동의 열기도 들끓고 있었습니다. 당시 아르헨티나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갈티에리는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국민들의 관심을 포클랜드로 돌렸습니다. 아르헨티나로부터 500km 떨어진 영국의 영토를 공격하기로 한 것입니다. 국토 회복이라는 명분으로 영국군을 쫓아내고 포클랜드 확보한다면 국민들의 지지가 높아질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습니다. 또 경제난을 겪던 영국에서도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이 작은 섬을 위해서 굳이 아르헨티나와 전면전을 치르지는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습니다. 이런 판단을 했던 갈티에리 대통령은 곧바로 포클랜드에 대한 군사작전을 지시합니다. 1982년 4월 2일, 항공모함을 포함해서 온갖 전력을 끌어모은 아르헨티나는 손쉽게 아르헨티나에 상륙했고 겨우 수십명의 불과했던 영국군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점령을 성공한 갈티에리 대통령은 영국과 적당히 협상하면서 지지도를 높이는 계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갈티에리
레오폴도 갈티에리

영국의 상황

당시 영국의 정부를 이끌고 있던 마거릿 대처 총리는 아르헨티나와 협상을 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국내 문제로 고민하던 갈티에리 대통령 못지 않게 영국 내부의 상황도 꽤 좋지 못했습니다. 이 시기 대처 내각의 강력한 민영화 정책으로 실업률은 갈수록 높아졌고 그와 동시에 영국 국민들의 지지율은 떨어져만 갔습니다. 대처 총리는 자신에 대한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서 포클랜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로 마음 먹습니다. 이러한 생각으로, 대처 총리는 아르헨티나에 전쟁을 선포합니다. 이로 인해 둘 중 한명의 정치적 생명은 막을 내릴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마거릿 대처
마거릿 대처 전 총리 [출처 : http://www.huffingtonpost.co.uk]

전쟁의 양상

전통적인 해군 강국인 영국이 조금 더 우위에 있었지만 포클랜드라는 곳이 영국과 멀리 떨어진 곳이다 보니 작전수행에 한계가 많았습니다. 아르헨티나는 영국과의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걱정해 두 나라는 4월 내내 포클랜드 상공에서 공중전만 벌였습니다. 영국군은 포클랜드에서 6300km 떨어진 어센션섬에서부터 폭격기를 보내 공중급유를 하면서 포클랜드의 활주로를 파괴했습니다. 아르헨티나군도 이에 맞서 프랑스에서 도입한 미라주 전투기를 출격시키곤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전쟁비용이 폭증하는 영국은 더 이상 상륙작전을 미룰 여유가 없었습니다. 영국은 상륙 전 완전한 재해권을 장악을 위해 포클랜드 앞바다에 해군을 집결시켰고 아르헨티나군도 이번 기회에 영국 해군을 섬멸하겠다는 심산으로 항공모함을 포함한 주력 해군을 포클랜드로 보냅니다. 4월 30일, 양측 합산 항공모함 3척, 구축함 20척으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역대 최대 규모의 정규군 간의 해상 교전이 일어날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의 함재기가 이륙하기 어려운 날씨로 인해 아르헨티나군은 뱃머리를 돌려 본토 기지로 복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영국의 원자력 잠수함 컨커러함이 아르헨티나의 벨그라노 순양함을 발견하지만 영국에서 포클랜드 주변에 선포한 완전봉쇄구역 그 밖의 구역에서는 교전을 금지했기 때문에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대처 총리는 교전수칙을 바꿔 벨그라노함에 대한 공격을 승인했습니다. 결국, 5월 2일 컨커러함에서 발사된 3발의 어뢰 중 2발이 명중하여 벨그라노 순양함은 완전히 침몰하게 되었습니다. 남아메리카 최강의 군사대국인 아르헨티나에서 콜로서스급 항공모함 다음으로 큰 함정이 순식간에 격침 당한 것입니다. 이를 보고 받은 갈티에리 대통령은 모든 해군 작전을 취소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아르헨티나의 해군 작전이 상륙 저지에서 대잠전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영국군은 포클랜드 앞바다를 모두 장악하게 되었으며 아르헨티나군을 무시하는 방심을 하게 됩니다. 아르헨티나는 영국군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입혀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가려는 계산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전까지 쓰이지 않았던 무기를 꺼내드는데 그것이 바로 프랑스의 엑조세 미사일입니다. 이 당시 함정들은 모두 하늘에서 날아오는 미사일만 방어를 했는데 엑조세 미사일은 해수면 위를 낮게 날아가 함정을 파괴하는 방식의 미사일이었습니다. 이전까지 쓰이지 않았던 무기를 아르헨티나군이 영국의 구축함을 상대로 처음 사용하게 됩니다. 셰필드함이 이 엑조세 미사일에 격침당하게 되면서 아르헨티나군의 무기를 구닥다리 취급하던 영국군은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영국군은 더 큰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두 척의 항공모함을 포클랜드에서 멀리 떨어진 기지로 대피시켰습니다. 영국군은 시간이 지날수록 피해가 커질 것을 우려하여 5월 21일 서둘러 상륙작전을 시행합니다. 아르헨티나군은 이런 영국군을 저지하기 위해 전투기를 띄우지만 영국 해군의 함재기로 인해 15대가 처참히 격추당했습니다. 상륙에 성공한 영국 해병대는 포클랜드의 아르헨티나 군을 무장해제 하며 다녔는데 상륙 25일째인 6월 14일, 포로가 된 숫자만 1만명이 넘었던 아르헨티나군은 영국군에게 완전히 항복하며 전쟁은 막을 내립니다.

아르헨티나 적진을 향한 영국군의 기관총 조준
아르헨티나 적진을 향한 영국군의 기관총 조준 [출처 : The Sun]

전쟁의 결과

두 나라 지도자의 정치 인생을 걸고 진행된 이 최후의 결전에서, 양국의 희비는 극명하게 엇갈렸습니다. 당시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정부의 언론 통제로 패전 사실을 모르다가 그해 치뤄진 월드컵 이후가 되어서야 해외 기자들로부터 이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정부가 패전한 것도 모자라 거짓말까지 했다는 사실에 분노한 국민들은 갈티에리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했고 결국, 갈티에리는 쓸쓸히 권좌에서 물러났습니다. 반면에 전쟁에서 승리한 대처 총리는 전쟁 직후 80%가 넘는 지지율을 누리며 행복한 정치 인생을 보냈습니다. 그와 동시에 벨그라노함과 셰필드함의 침몰로 잠수함과 대함 미사일의 위력이 크게 강조되며 해상전의 트렌드가 크게 바뀌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두 정치인의 피할 수 없는 전쟁, 포클랜드 전쟁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현대전의 양상을 바꾸고 두 정치인의 인생을 바꾸었던 전쟁이지만 얻을 것 없는 황량한 섬에서 국민들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오늘의 포스팅을 마치겠습니다.

 

포클랜드 전쟁의 결과로 제작된 엘리자베스 항공모함을 알아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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